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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야스토리] 사회인야구 이야기의 첫 시작

 

 

2000년 초등학교 4학년 시절 엄마 손 잡고 처음 나들이 한 잠실야구장. 초딩은 야구장 앞 아줌마들이 파는 로고가 적히지 않은 야매 막대풍선을 기꺼이 사들고 설렌 마음을 안고 야구장에 들어섰다. 관중석으로 향하는 어두컴컴한 복도와 모서리 끝 새어나오는 빛을 바라보며 야트막한 오르막길을 초딩은 씩씩히 올랐다. 눈 앞에 펼쳐진 광활한 잠실야구장의 사이즈와 푸른 잔디 위에서 각자의 연습에 매진하는 선수들의 풍경, 관중들의 입장하는 웅성거림에 넋을 잃었고 본 경기를 보며 프로야구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일찍이 야구보이가 된 초딩은 학교를 마치면 책가방을 내던지고 엄마를 졸라 샀던 야구배트와 테니스공, 글러브를 자전거 바구니에 싣고 놀이터 공터로 향했다. 오가는 친구가 보이면 붙잡아서 같이 던지고 치고 달렸고, 없으면 혼자 공을 치고 주우러 가며 놀았다. 놀이터 옆 세탁소 아저씨는 자기 공이 120km/h는 나올거라며 초딩을 상대로 무지막지한 직구를 던져댔는데, 운 좋게 하나 맞추면 '어린데 잘 친다. 야구선수 해봐라'며 동네슈퍼에서 하드 하나를 사줬다.

 


어느덧 초딩은 동네 홈런왕이 됐다. 물론 대개 아리랑볼을 던지는 친구들이었고, 홈런의 기준은 야구장비의 주인이 정했기에 홈런왕은 어렵지 않았다; 초딩은 엄마한테 말했다. "야구선수가 되고 싶어!" 하지만 동네국밥집을 운영하면서 하루에 5그릇을 겨우 팔까말까하고, 연일 술 마시고 사고치는 아빠의 뒷바라지에 여념없는 집 상황은 무지막지한 돈이 든다는 야구를 할 수 없었다. 초딩은 어렸지만 꽤 철이 빨리 들었다. 엄마한테는 "괜찮아 그냥 동네야구하고 프로야구 재밌게 볼게. '사회인야구'라는게 있다던데 커서 할게..." 그날 밤 초딩의 베갯잎은 축축히 젖었다.

세월이 흘러 초딩은 중고딩을 넘어 대딩이 됐다. 스무살 대딩은 등록금 4백만원이 넘는 공대에 들어갔으면서 공부할 생각은 안 하고(하다 못해 연애라도 하든지;) 대학야구동아리를 찾았다. 체대동아리가 모태였던지라 군기가 잡힌 곳이었다. 물 주전자 나르고 장비 챙기면서 경기 후반 대수비, 대주자로만 나섰지만 대딩은 즐거웠다. 테니스공이 아닌 경식야구공의 딱딱함, 커진 알로이 배트의 사이즈는 야구를 한다의 느낌이 팍팍 왔다. 이제 야구 인생을 꽃 피우는가 싶더니 대딩은 군 복무를 하러 총을 잡았고, 전역 후 졸업과 취업에 허덕이는 평범한 대딩으로 전락했다.

그러던 대딩은 어렵사리 대학 졸업을 마치고 첫 직장 월급을 받자마자 적금 통장 개설 대신 사회인야구팀을 검색했다. 오랜 세월 애써 묻어온 야구 DNA는 직딩 몸 속에 죽지 않고 움틀댔던 것이다.


직딩은 2016년 10월 한 지역의 동네지인들로 이뤄진 아저씨 야구팀에 가입했다. 리틀야구장보다 작고 잡초가 발목까지 올라온 서울 한강광나루야구장에서 사야에 첫 발을 내딛었다. 그렇게 시작한 사야는 현재까지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운동형 몸매의 이유는 야구를 잘하기 위해서 기초체력 운동을 한 것이고, 평일 야간-주말 스케줄의 우선은 리그 일정에 벗어나지 않도록 조정한다. 뚜벅이는 더 많은 야구를 하고자 중고차도 샀으며, 장비도 한두푼 모으는 기쁨도 맛 봤다.

무엇보다 우리팀 9명, 상대팀 9명이 모여 일상의 바쁨과 고민을 내려놓은 채 공 하나에 집중하며 웃고 떠들고 소리치고 환호하고 가끔 분노도 표출하는 게 사야의 매력이다. 내가 잘하면 팀원이 축하해주고 못하면 위로받는 점들이 평소 느끼지 못하는 뜨거움을 만끽한다. 

마음은 프로 몸은 사회인. 사회인야구는 이런저런 사람들이 야구가 좋아 모여 뛰노는 풋내나는 스포츠다.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인 사야, 쩐내 나는 포수장비처럼 사야인들의 이야기를 가감없이 풀어 색다른 즐거움을 펼쳐보고자 한다.